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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味의 풍경

休淡 2015. 8. 21. 22:52

 

 

 

 

 

 

 

 

 

 

 

 

 

 

검은 압축, 흰 여백 사이를 떠도는 침묵의 음표들

 - 조강제 사진전에 부침

 

   

조강제의 풍경은 멀다. 혹은 멀어지는 풍경이다. 그는 도시 속에 숨어 있는 먼 풍경, 먼 시선을 찾아다니는 순례자다. 도시의 풍경은 대체로 가까운 풍경이기 마련이다. 파편화된 채 착취되는 도시의 공간은 도처에서 우리의 시선을 차단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시선은 가까운 것들 사이에 포위된다. 도시의 시선, 혹은 도시의 시선 배후에 작동하고 있는 근대 시선의 코드는 근시이다.

동아시아 산수화의 투시법을 삼원법(三遠法)이라 한다. 산 아래에서 산꼭대기를 우러러봄을 고원(高遠)이라 하며, 산의 앞에서 산의 뒤를 엿봄을 심원(深遠),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바라보는 시선을 평원(平遠)이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에 들어 있는 ‘원(遠)’이다. 그것은 멀리 바라보는 것이다. 동아시아 산수화 시선의 코드는 원시이다.

 

 시선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압축한다. 근시의 시선은 대상을 분석하고 쪼개는 자연과학적 욕망의 시선이다. 그 욕망은 대상을 지배하고 소유하고자 한다. 반면 산수화의 원법(遠法)은 개체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을 넘어서 풍경 전체의 형세인 ‘큰 이미지[大象]’를 보기 위한 시선이다. 그것은 대상을 지배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한한 자연의 리듬과 합일하고자 한다. 산수화에서 원시란 단순히 멀리 보는 시선이 아니라 산수를 통해 보이지 않는 도(道, 혹은 大象)를 체험하려는 시선인 것이다. 이 ‘원’은 바로 노장사상과 현학이 추구하는 정신경계인 ‘현(玄)’과 ‘무(無)’의 다른 이름이다. ‘현’은 아득히 멀어서 포착하기 힘든 가물가물한 빛을 형용한 말이다. ‘원’, ‘현’, ‘무’는 실로 도의 형용이다. 조강제의 먼 풍경은 이러한 ‘현’의 욕망, ‘무’의 욕망과 잇닿아 있다.

 

 조강제의 렌즈 속에는 대체로 두 개의 공간이 충돌하거나 결합되어 있다. 카메라 렌즈로부터 길과 가로등과 사람 등의 실루엣이 있는 전경까지의 초점 공간, 그리고 거기서부터 그 배경이 되고 있는 후경의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은 그 사이의 공간들이 생략된 채 매우 압축적으로 한 프레임에 담기면서 돌연한 효과를 가져 온다. 전자의 공간은 하단에 좁게 어둠으로 압축된다. 반면 후자의 공간은 사진 상단으로 확산되면서 아득한 여백을 연다. 검은 압축과 흰 확산의 경계에 사람의 실루엣이 있다. 두 공간이 한 프레임에 압축적으로 결합됨으로써 생성된 것이 이 실루엣의 자리이다. 그곳이 우리 존재의 지평이다. 그 지평의 실루엣은 황홀(恍惚)하다. 여기서 황홀은 ‘찬란하고 화려함’의 뜻이 아니라 이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노자 『도덕경』의 의미에서 황홀이다. 『도덕경』 속에서 ‘황홀’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한 미묘한 도의 형용이다. 그것은 유(有)와 무(無) 사이의 진동이며 검은 압축과 흰 확산 사이의 설렘이다. 그 존재론적 빛깔을 ‘현’이라고 한다. 조강제의 작품 중에 시든 연 줄기와 물의 반영이 만드는 기이한 우연의 상형들은 유와 무, 가상과 실재가 만나서 만드는 일종의 현의 기하학, 황홀의 기호학이다. 연 줄기가 만드는 기호와 전경과 후경 사이에 있는 사람의 실루엣은 그 지평을 같이 한다. 그리고 이 실루엣은 멀리서 볼 때만이 포착 가능하다.

 

 조강제의 사진에는 대체로 전경과 후경이 모두 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원근감은 약화되고 원감(遠感)이 주조를 이룬다. 특히 후경 너머로 열린 아득함은 그의 시선이 산수화의 시선을 사진의 풍경 속에 끌어들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화면의 대부분은 놀랍게도 아득한 여백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현상학』의 공간 분석에서, 사물이 갖는 크기의 개념인 넓이나 높이는 측정 가능한 것이지만 깊이와 아득함은 사물 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사물에로 향하는 우리 몸의 지각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넓이와 높이는 제3자의 입장에서 ‘더 넓다’ ‘더 높다’고 비교하고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깊이와 아득함은 객관적 측량이 불가능하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대상은 어떤 바탕에로 미끄러져 가는 형태의 운동과 같다. 그리고 우리 몸은 객관적 관찰자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그 대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치나 전망이 아득함을 주는 깊이를 드러낼 때 세계는 내가 시각적으로 지배하고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의 차원으로 변형된다. 그리고 우리도 어느덧 그 차원 속에 스며들게 된다. 조강제의 풍경은 측량할 수 없는 아득함을 열고 있다. 그때 우리는 그 초점의 심도를 넘어서 저 먼 배경과 배경 너머의 여백, 소유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그 한 부분인 무한을 얼핏 체험하게 한다. 심지어 도시의 풍경 속에서 말이다. “여운이 강을 건너 멀어져 가네/ 하늘 가장자리에 이르니 어찌 다시 찾을까(餘韻渡江去, 天涯安可尋).”하는 이백의 시 구절처럼.

 

 조강제는 도시와 풍경, 그리고 사물들 속에 숨어 있는 침묵의 아득함을 드러낸다. 모차르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 조강제의 렌즈 속에 실루엣을 이루는 사람들은 음표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차라리 침묵의 음표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그 침묵의 음표들은 상징계의 미로를 자꾸만 벗어난다. 그것은 어떤 지시나 상징이 아니다. 다만 거기, 존재의 무게(어둠)를 용납하면서도 여백의 자유(빛)를 품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그것이 전경의 검은 압축, 후경의 흰 여백을 생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강제의 풍경에서 “심오한 경계는 형상을 넘어선 곳에서 생성된다(境生于象外).”, “필묵이 다한 곳에서 필묵을 드러낸다(無筆墨處而見筆墨)”는 오래된 동아시아 미학의 금언을 떠올려보는 것이 결코 지나친 것은 아니리라.

우연의 순간 앞에 문득 노출되는 이 실루엣들은 근시의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잊어버리거나 감추고 있던 먼 시선의 여백을 불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조강제의 먼 풍경은 여백의 맛, 무미(無味)하면서도 무한한 맛을 품는 담미(淡味)에 이르게 된다. 이 담미야말로 조강제의 사진이 가지는 무위(無爲)한 유혹이다.

 

이성희(시인, 미학자)